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은 아이들에 비유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아이들의 불평처럼, 사람들은 금욕적으로 먹고 마시지 않는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 들렸다고 하고, 먹고 마시는 인자에게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서로 다른 두 사역 방식에 모두 거절 이유를 붙이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Luke 7:31-34에서 장터 아이들의 비유는 사람들이 자신이 기대한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요한의 절제된 삶은 거절당하고, 예수가 식탁에 함께하는 삶도 거절당합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는 예수가 스스로 붙인 훈장이 아니라 그를 흠잡으려는 이들이 한 말입니다.
그러나 Luke의 앞선 레위의 식탁 장면에서 예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식탁 교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동의가 아니라, 회개로 부르시는 예수의 환대와 선포가 실제 사람들에게 닿는 자리입니다. 요한의 금식과 예수의 식탁은 서로 대립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의 증언으로 놓입니다.
35절은 지혜가 자기의 모든 자녀로 말미암아 옳다 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Luke는 즉각적 평판이 아니라 지혜가 낳는 응답과 열매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모든 비판을 무시하라는 방패도, 예수의 식탁을 방종의 허가로 만드는 말도 아니라,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열매로 그 사역을 분별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흔히 이렇게 읽는다 —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예수가 죄를 승인했다는 뜻으로 바꾸거나, 식탁 교제를 이유로 어떤 회개와 책임도 필요 없다고 읽는 것.
본문이 말하는 것 — Luke 7:31-35은 이 표현을 비난으로 전하고, Luke 5:27-32은 예수가 죄인을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한다. 지혜는 자기의 자녀로 말미암아 옳다 함을 얻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지혜의 모든 자녀’가 예수와 요한의 사역에서 나온 응답자들을 가리키는지, 지혜가 낳는 행위의 결과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표현 방식은 논의될 수 있다. Luke는 이 문장을 요한과 예수에게 상반된 비난을 붙인 세대의 반응 뒤에 둔다.

35절은 지혜가 자기의 모든 자녀로 말미암아 옳다 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Luke는 즉각적 평판이 아니라 지혜가 낳는 응답과 열매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모든 비판을 무시하라는 방패도, 예수의 식탁을 방종의 허가로 만드는 말도 아니라,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열매로 그 사역을 분별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 중
내가 다시 볼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