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누가복음 18장 1절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제도와 규범근거 확인됨

그때 그 자리에서는

오늘의 독자는 “항상 기도하라”를 같은 문장을 쉬지 않고 반복하라는 명령으로 듣기 쉽지만, 누가복음의 대비는 기다림 속에서도 기도를 이어 가는 삶과 낙심하여 포기하는 삶 사이에 있습니다. 고대 성경 세계에서 과부는 가족의 남성 보호와 재산 기반이 약해질 수 있어 법적 착취에 노출되기 쉬운 대표적 인물이었고, 재판장은 바로 그런 사람의 권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부가 가난하거나 후견인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이 비유도 과부의 재산 상태나 소송 종류를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개역개정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는 사적인 복수를 부탁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장면은 상대방에게서 보호받고 정당한 판결을 얻으려는 법정 청원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을 냉담한 재판장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런 재판장조차 움직인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확실히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겠느냐고 대조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

누가복음 18:1은 비유의 목적을 먼저 밝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누가복음 17:20–37과 이어집니다.

그 문맥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날을 사람이 계산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다림이 길고 악이 바로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날짜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계속 부르짖으며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유의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성경이 재판장에게 요구하는 공정함과 약자 보호를 모두 거부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과부는 자기 상대에게서 정의를 얻도록 판결해 달라고 거듭 찾아옵니다.

누가복음 18:3의 동사 형태는 한 번의 방문보다 계속 찾아오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그립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침해된 권리를 바로잡고 상대의 공격에서 보호해 달라는 판결입니다.

재판장은 얼마 동안 거절하다가 과부가 자신을 계속 성가시게 할 것을 피하려고 판결합니다. 그의 동기는 정의가 아니라 자기 편안함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붙잡아 “불의한 재판장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신 뒤, 더 작은 경우에서 더 큰 경우로 논증하십니다.

낯선 과부에게 마지못해 응답한 불의한 재판장과 달리, 하나님은 자기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출애굽기 22:22–23은 과부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하고,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고 선언하며, 시편 146:9은 하나님이 과부를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확신은 기도의 횟수가 하나님을 굴복시킨다는 데 있지 않고, 기도하는 이가 어떤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지에 있습니다.

7–8절의 시간 표현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본문은 택하신 자들이 밤낮 부르짖는 기다림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정의를 베푸실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속히”가 체감상 곧바로를 뜻하는지, 정한 때가 이르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더 강하게 갖는지는 논의되지만, 어느 해석도 모든 개인적 바람이 반복 횟수만 채우면 즉시 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공식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가 직접 다루는 청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악과 압박 속에서 정의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정확한 시점은 제자들의 손에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최종적인 정의는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비유의 마지막 질문은 결과보다 제자의 상태를 겨눕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질문은 하나님이 신실하신가를 의심하게 하기보다, 지연과 불의 속에서도 제자들이 기도하는 믿음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를 묻습니다. 누가복음 21:34–36과 22:40, 46도 다가올 시험 앞에서 깨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같은 요구를 끝없이 되풀이해 원하는 답을 얻으라는 기술이 아니라, 인자의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정의와 신실하심을 붙들라는 제자도의 요청입니다.

잘못 알기 쉬운 것

흔히 이렇게 읽는다 — 같은 소원을 충분히 오래 반복해 하나님을 지치게 만들면, 하나님도 마지못해 원하는 답을 반드시 주신다는 해석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 —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과 동일시하지 않고 대조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자기 이익 때문에 과부에게 정의를 베푼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확실히 들으십니다. 비유의 결말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기법이 아니라 인자가 올 때까지 기도하는 믿음이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이 설명이 선 자리 — 출처
점토판과 두루마리 — 지금도 남아 있는 사료
지금도 남아 있는 것
LUK 18:1, NKRV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A2026-07-30
LUK 17:20-37, especially 17:22-30, NKRV.
A2026-07-30
LUK 18:2-5, NKRV.
A2026-07-30
LUK 18:3, NKRV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A2026-07-30
LUK 18:6-8, NKRV.
A2026-07-30
EXO 22:22-23; DEU 10:17-18; DEU 24:17; PSA 146:9; ISA 1:17, 23, NKRV.
A2026-07-30
LUK 21:34-36; 22:40, 46, NKRV.
A2026-07-30
MorphGNT SBLGNT 6.12, Luke 18:1
proseuchesthai V--PMN; enkakein V--PAN.
A2026-07-30
아직 모르는 것

과부의 소송이 채무·토지·상속 가운데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가난했는지, 후견인이나 가족이 없었는지, 재판장이 유대인 장로·도시 재판관·로마계 관리 가운데 누구였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υποπιαζη(휘포피아제, hypōpiazē, ‘완전히 지치게 하다·눈 밑을 치다·평판을 상하게 하다’)의 구체적 뉘앙스, μακροθυμει(마크로튀메이, makrothymei, ‘오래 참다·인내하다’)의 문법적 연결과 번역, εν ταχει(엔 타케이, en tachei, ‘속히·신속하게’)가 “곧”과 “때가 이르면 신속하게” 가운데 어느 뉘앙스를 더 강하게 갖는지도 논의가 계속됩니다. 따라서 본문이 확실히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응답과 제자의 지속하는 믿음은 중심에 두되, 소송 장면과 시간표는 단정하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자리

재판장은 얼마 동안 거절하다가 과부가 자신을 계속 성가시게 할 것을 피하려고 판결합니다. 그의 동기는 정의가 아니라 자기 편안함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붙잡아 “불의한 재판장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신 뒤, 더 작은 경우에서 더 큰 경우로 논증하십니다.

낯선 과부에게 마지못해 응답한 불의한 재판장과 달리, 하나님은 자기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출애굽기 22:22–23은 과부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하고,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고 선언하며, 시편 146:9은 하나님이 과부를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확신은 기도의 횟수가 하나님을 굴복시킨다는 데 있지 않고, 기도하는 이가 어떤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지에 있습니다.

본문에 있는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한 가지만 남긴다면

이 규례가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으로 돌아가기
다음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