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평지에 내려오신 예수 앞에는 제자들의 많은 무리와 유대·예루살렘·두로·시돈 해안에서 온 백성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자·지금 주린 자·우는 자·인자로 말미암아 배척받는 자에게 복을 선언하고, 부요한 자·지금 배부른 자·웃는 자·모두에게 칭찬받는 자에게 화를 선언합니다. Luke는 현재의 결핍과 만족, 사회적 배척과 칭찬을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대조합니다.
Luke 6:20-23에서 예수는 ‘너희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지금 주린 자는 배부름을, 우는 자는 웃음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고 멀리함·욕함·이름이 버림을 당할 때에도 하늘의 상과 선지자들이 받은 대우를 기억하며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복은 고통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현재 결핍과 배척이 최종 판결이 아님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24-26절의 화는 부요함·배부름·웃음·대중의 칭찬을 가진 모든 사람의 인간 가치를 부정하는 저주가 아닙니다.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는 경고는 지금 누리는 안전과 만족이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자신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Luke는 복의 네 쌍과 화의 네 쌍을 나란히 두어, 현재의 상태를 영원한 질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뒤집습니다.
Matthew 5의 복 선언과 비교하면 Luke는 가난·주림·울음과 부요·배부름·웃음을 더 직접적으로 대조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난한 상태만으로 자동 구원을 약속하거나, 가진 사람을 일괄적으로 정죄하는 공식으로 줄일 수는 없습니다. Jesus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인자 때문에 받는 배척을 거짓 선지자들이 칭찬받던 경우와 대조해 신실함의 기준을 드러내십니다.
흔히 이렇게 읽는다 — 가난 자체를 자동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부요함만으로 한 사람을 정죄하거나 축복의 증거로 확정하는 것.
본문이 말하는 것 — Luke 6:20-26은 가난·주림·울음·배척에 대한 복과 부요·배부름·웃음·칭찬에 대한 화를 대조하며, 하나님 나라와 인자를 위한 배척,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기억을 함께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Luke의 ‘가난한 자’를 물질적 가난에 우선 무게를 둘지, 제자 공동체의 의존과 배척을 함께 가리킬지에 대한 강조점은 해석자마다 다르다. 직접 문맥은 가난·주림·울음과 부요·배부름·웃음의 실재를 대조하면서, 인자 때문에 받는 배척과 선지자·거짓 선지자의 기억을 함께 둔다.

Luke 6:20-23에서 예수는 ‘너희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지금 주린 자는 배부름을, 우는 자는 웃음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고 멀리함·욕함·이름이 버림을 당할 때에도 하늘의 상과 선지자들이 받은 대우를 기억하며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복은 고통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현재 결핍과 배척이 최종 판결이 아님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 중
내가 다시 볼 것은?